옛 명성을 되살리는 마을들-아산리, 군덕리, 공세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1396
한자 -名聲-牙山里君德里貢稅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진용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과거에 매우 번성했지만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점차 침체되었다가 정부의 농촌 지원 사업과 주민 주도의 마을 만들기 사업 등을 통해 새롭게 거듭나고자 노력하는 마을들의 이야기.

[다시 태어나는 아산현과 영인면 아산리]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는 조선시대 아산현의 관아가 있던 치소(治所)였다. 아산현은 1895년 아산군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14년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아산군 현내면, 일북면, 이북면의 33개 리가 13개 리로 통합되면서 영인면으로 개정되었다. 동시에 인접한 아산군, 신창군, 온양군 등 세 개의 군이 아산군으로 통합되고 군청을 영인면 아산리에 두었다. 지금까지 영인면 아산리 영인초등학교 앞에 남아 있는 여민루는 조선시대 아산현 관아에 있던 문루였고 인근에 아산향교가 자리한 것을 보면, 아산리가 당시 아산현의 행정, 교육, 상업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부터 아산리에는 5일장으로 아산장이 서서 인근 지역 물류의 중심지였고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으며, 아산장은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유지되었다. 아산군청은 1922년의 장항선 철도 개통 시기에 맞춰 새로운 발전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온양읍 온천리로 이전되었다. 그로 인해 군청소재지였던 영인면 아산리는 영인면소재지 정도로 위상과 기능이 약화되었다. 광복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도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발전이 늦어지면서 일반적인 농촌의 면소재지로서 취약한 삶의 질과 정주 환경, 인구 감소와 고령화의 문제가 맞물리며 지역경제의 위축으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아산리, 넓게 보면 영인면의 주민들은 지역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뚜렷하고 강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정체성의 산물 중 하나가 2000년 7월에 발간된 『아산영인향토지』 편찬이었다. 아산리상성리 등 인근 마을의 뜻 있는 사람들이 영인향토지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몇 년 동안 노력한 소중한 결과물이었다.

2010년 10월 아산리 지역 주민들은 이러한 지역사회의 현실을 개선하고자 뜻을 모으고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농림부에서 시행 중인 읍면소재지 종합정비사업을 신청해 도약의 발판을 모색하였다. 지역사회의 주민들과 행정이 함께 참여한 추진위원회는 아산리가 수도권에서 충청남도로 이어지는 관문의 위치이며 연간 30만 명 이상이 찾는 영인산자연휴양림영인저수지, 그리고 토정 이지함, 김옥균 등 역사적 인물과 여민루, 김옥균선생 유허, 아산향교 등 역사 자원이 풍부한 점에 주목하였다.

우선 면사무소 앞 주도로를 중심으로 진입 공간 이미지 형성을 위한 가로 경관 정비를 추진하고, 마을 안길에 토정 이지함을 테마로 한 다목적 광장과 커뮤니티센터를 설치해 행사와 복지, 주민 편의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또한 중심 상권 지역과 역사 문화 공간, 영인산자연휴양림 등 주요 거점을 이어주며 이야기가 있는 둘레길을 조성해 공간·자원 간 연계성과 방문객들의 흥미를 유발하고자 하였다.

읍면소재지 종합 정비 사업은 2012년에 선정되어 2014년 기본 계획을 마치고 2019년까지 70억 원의 사업비를 투여해 진행되고 있다. 다목적 광장과 커뮤니티센터, 둘레길 등 물리적인 결과물 외에도 주민들의 의견을 모으고 결정하기 위한 노력들, 주민자치 역량 강화를 위한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2018년 9월에는 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협동조합 ‘토정관’을 설립해 사업 종료 후 각종 시설들의 관리, 운영을 준비하고 있다.

[4·4만세운동의 고향, 선장면 군덕리]

충청남도 아산시 선장면 군덕리는 크게 3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군덕1리는 장터마을, 군덕2리는 다실기, 군덕3리는 노랫골마을이다. ‘장터’라는 명칭은 5일장으로 선장장이 서는 곳이어서 붙여졌다. 선장장은 원래 언덕 너머 동쪽의 선창리에 있었다. 그런데 군덕리에 개항 이후 포구가 크게 발달하고 물류가 활발해지면서 이곳 군덕리로 옮겨졌다. 인근 다른 지역에 큰 장이 없었기 때문에 선장장터에는 당진군 우강면, 아산군 인주면, 신창면, 도고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장터마을 앞 선장포구는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며 충청남도 서북지역의 상품 교류와 여객 수송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선장장터에서 1919년 4월 4일에 만세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1922년 장항선 철도가 개통되고 인근 도고면 신언리선장역[후에 도고역]이 설치된 이후에도 한동안 철도와 연계되면서 물류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물류의 중심이 점차 철도나 자동차 등 육상 운송으로 옮겨지고, 공업과 도시 중심의 산업화 과정을 겪으면서 선장면 군덕리 일대는 활기를 잃어가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1979년에 삽교천방조제가 축조되면서 바다를 통한 교류와 유통의 길이 완전히 막히면서 상권은 약화되고 서서히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마을이 되었다.

그렇지만 선장면 군덕리 주민들은 번성했던 시기의 기억과 자부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 뭔가 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하였다. 그런 배경에서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작된 일 중 하나가 군덕리 선장장터에서 일어났던 3·1만세운동, 즉 선장 4·4만세운동의 기념과 재연이었다. 선장면 차원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아산시 차원의 기념행사로 발전하였으니 2018년의 행사 이름이 ‘제8회 4·4아산독립만세운동 재연행사’였다.

또한 새로운 차원의 일이 추진되었다. 2011년 이장을 중심으로 한 마을 주민들은 정부의 농촌 소재지 종합 정비 사업을 군덕리에 유치하고자 힘을 모으고 그해 말에 사업 기간 4년, 사업비 100억 원의 사업 대상지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사업 부지 확보와 실행 계획을 마련하는 단계부터 다양한 이견을 갖는 주민들의 민원과 합의 과정의 어려움을 겪게 되고 수많은 회의와 토론, 설득의 과정을 거쳐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마을의 이장, 반장, 개발위원 등을 중심으로 구성된 추진위원회는 노후된 주거환경과 관광자원의 부족이라는 약점을 군덕리의 농촌 풍경과 삽교천, 4·4독립만세운동,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입지로 인근 지역과 교류의 중심이었던 역사성 등을 살려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기반 시설 정비를 통한 정주환경 개선과 여가 공간 조성을 위해 선장초등학교·선장중학교 앞 등하교길 정비, 마을회관 리모델링, 유·무선 방송시설 및 주요 진입로 CCTV 설치, 중심가로 간판 정비 및 지중화 사업, 광장 및 쉼터, 게이트볼장 등을 갖춘 복합공간[선장포 노을공원]도 조성하였다. 그리고 장터 자리의 가옥을 매입해 4·4독립만세운동을 테마로 한 조형물과 상징공간을 만들고, 기존 마을길을 정비하면서 독립운동을 테마로 한 이야기가 있는 마을길 조성, 무궁화·태극기 길 조성 등을 추진하였다. 지역 활성화를 위한 전문가 컨설팅과 다양한 주민 역량 강화 사업을 병행하며 교육과 합의의 과정을 거쳤고, 마을의 이미지를 대표할 ‘선장포’라는 브랜드도 마련하였다. 나아가 추진위원회는 영농조합법인 등 소득 사업을 위한 기반 조성, 역사와 생태 교육 등을 소재로 한 체험마을 운영 등을 새롭게 고민하고 있다.

[공세리협동조합의 마을만들기, 인주면 공세리]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의 ‘공세리’라는 명칭은 세곡을 모으는 조창에서 비롯되었다. 이곳에 조선시대 충청도 40개 고을 지역에서 조세로 거두어들인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조창]인 공세곶창이 있었다. 공세창, 공진창, 아산창이라고도 불렀다. 당시 조운선 15척과 운반 인원 720명, 곡식의 수납과 운송 책임자인 해운판관이 배치, 운영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공세곶창의 기능은 조선 후기 사회경제와 유통 방식의 변화로 인해 서서히 축소되었고, 마침내 19세기 중반에 조창이 폐기되면서 공세리 마을도 그에 따라 점차 쇠락하였다.

그런 공세리에 1895년 성당이 처음 생겼고 1897년에는 공세곶창 자리에 공세리성당이 들어섰다. 공세리아산만 맨 안쪽에 위치하여 충청도 내포 지방의 중요한 길목 중 한 곳이었고, 바다를 통한 교류와 교역의 요충지였다. 일찍부터 조운을 통해 서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바다를 통해 중국과 문물 교류가 활발하였다. 그 상징적인 일 중 하나가 천주교의 이른 전파였고, 교통 요지여서 천주교 성당이 들어선 것이다.

공세리성당은 2005년 한국관광공사가 뽑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고 연간 20만 명의 외지인이 공세리성당을 찾는다. 그렇지만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공세리 마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또한 공세리에는 고령화에 따른 복지 수요 증가, 외부 일자리 의존으로 인한 공동화, 투기와 난개발에 의한 공동체와 경관 훼손 우려, 열악한 돌봄·교육·문화 환경 등 농촌마을의 어려움들이 존재하였다.

여러 산적한 문제들 중 주민에게 가장 절실하게 다가온 것은 열악한 교육 환경이었다. 2011년에는 지역 내 모 기업의 매연으로 인한 인주중학교 학생들의 피해 문제로 주민들은 대책위원를 구성해서 문제 해결에 나섰고, 결국 기업 측에서 부지를 마련해 학교 이전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 무렵 아산시 공모 사업을 통해 공세리성당 입구에 컨테이너로 만든 ‘꿈꾸는 팽나무 도서관’을 세웠다. 성당과 신용협동조합에서 토지를 무상으로 대여받았고, 한살림의 후원과 마을주민들의 자원봉사를 통해 마련한 공간이었다. 또한 2011년부터 아산시의 평생학습마을로 지정 받아 마을회관 등의 공간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과 경험을 기반으로 2012년 12월에는 다양한 마을 사업들을 더욱 조직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26명의 주민들이 모여 공세리마을협동조합을 창립하였다.

협동조합의 창립과 함께 공세리의 마을 만들기 사업은 한층 탄력을 받았다. 2013년에는 성당 입구 지하 공간을 10년간 무상 임대 받아 마을 북카페 ‘공세리 이야기’를 개소하고 마을기업으로 지정을 받았다. 2014년에는 충청남도 공모 사업으로 ‘공세리 공감 마을 만들기’ 사업을 추진해 마을 경관을 개선하고, 나누미지역아동센터를 유치해 방과후 돌봄을 안정적으로 제공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지역아동센터 공간 역시 지역 주민이 3년간 무상으로 내주었다. 경제사업의 일환으로 친환경 하우스 토마토를 생산하고 지역 농산물의 판로 확대를 위해 일요장터를 개설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협동조합 운영에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좋은 뜻과 상관없이 농산물 판로 개척은 현실의 문제였고, 북카페의 수입이 상근 인력을 운영할 만큼에 이를 무렵 인근에 경쟁업체가 생겼다. 조합 소유의 자산과 공간 없이 역할과 사업을 확대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핵심 활동가들의 지속적인 헌신이 요구되는 현실의 문제도 있었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공세리마을협동조합은 창립 여섯 돌을 맞으며 지역사회의 다양한 욕구들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방법과 이를 위한 경제 사업을 고민하고 있다. 공세리성당의 아름다운 풍광만큼 공세리 마을 주민들도 화사하고 밝은 미래를 꿈꾸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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