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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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滿空 |
영어공식명칭 | Mangong |
이칭/별칭 | 송도암(宋道巖),월면(月面)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유곡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이홍구 |
출생 시기/일시 | 1871년 3월 7일 - 만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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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서품 시기/일시 | 1883년 - 만공 출가 |
출가|서품 시기/일시 | 1884년 - 만공 수행 시작 |
출가|서품 시기/일시 | 1884년 12월 - 만공 사미계 받음 |
활동 시기/일시 | 1893년 - 만공 봉곡사에서 수행 시작 |
활동 시기/일시 | 1904년 7월 - 만공 법호를 받음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 만공 수덕사 부근 금선대에서 설법 시작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1938년 - 만공 마곡사 주지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946년 10월 20일 - 만공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덕숭산 전월사에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47년 - 광복 후 최초로 세운 부도 만공탑[사리 무덤] 건립 |
출생지 | 전라북도 태인군 군내면 상일리[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
활동지 | 봉곡사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도송로632번길 138[유곡리 595] |
성격 | 승려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마곡사 주지 |
[정의]
충청남도 아산군 송악면[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봉곡사에서 수행하였으며, 공주 마곡사 주지를 지냈던 승려.
[개설]
승려 만공(滿空)[1871~1946]의 승려가 되기 전의 이름은 송도암(宋道巖)이다. 본관은 여산(礪山), 법명은 월면(月面), 법호는 만공(滿空)이다. 1871년 3월 7일 전라북도 태인군 군내면 상일리[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서 태어나 일제의 식민지배의 만행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활동 사항]
만공이 1883년 13세 되던 해 겨울 절에서 설을 보내면서 출가 의지를 가졌고, 전주 봉서사, 순천 송광사, 논산 쌍계사, 공주 동학사 등을 거쳐 1884년 10월 초 서산 천장암(天藏庵)에 도착하였다. 천장암에서 승려 태허(泰虛)[1898~1969]를 은사(恩師)[출가시켜 길러 준 스승]로, 승려 경허(鏡虛)[1849~1912]를 계사(戒師)[계를 주는 승려]로 하여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불법(佛法)을 공부하였다. 1893년 11월 서산 천장암을 떠나 아산 봉곡사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1895년 7월 큰 깨달음을 얻고, 지리산과 전라남도 장성을 거쳐 마곡사로 돌아왔다. 1898년 스승 경허를 따라 동래 범어사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홀로 통도사 백운암에 들렀다. 이때 장마를 만나 보름을 지냈는데 또다시 깨달음을 얻게 되고, 1901년 7월 승려 경허가 있는 서산 천장암으로 돌아왔다. 1904년 ‘만공’이란 법호를 받은 후 충청남도 예산 덕숭산 수덕사 부근의 금선대에서 설법을 열었다. 또한 서산 간월암, 예산 덕숭산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 등의 중창에 관여하고 승려들을 길러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에는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의식을 가졌다. 1935년부터 3년간 마곡사 주지를 지내면서 대처(帶妻)[아내를 둠], 음주, 식육을 하는 일본 불교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할 것을 주장하였다. 1941년 3월 10일에 열린 한 고승대회에서는 조선 전통 불교를 굳게 지킬 것을 선언했다. 당시 조선 말살 정책을 펼친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총독의 회유도 거절하는 등 식민지배의 만행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말년에 덕숭산에 ‘전월사’란 띠집을 짓고 지냈으며 1946년 10월 20일 사망하였다.
[묘소]
만공은 입적한 후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에 제자들이 ‘만공탑’이란 이름으로 부도[사리 무덤]를 세웠다. 불교의 팔정도(八正道)를 의미하는 팔각 받침 위에 삼보(三寶)를 뜻하는 불(佛), 법(法), 승(僧) 삼각 기둥을 세우고, 둥근 공 모양의 돌을 올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