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809
한자 金聖學
이칭/별칭 알렉시오[세례명]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한성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0년연표보기 - 김성학 출생
수학 시기/일시 1883년~1891년 - 김성학 말레이시아 페낭신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892년~1897년 - 김성학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신학 공부
출가|서품 시기/일시 1897년 12월 - 김성학 사제 서품
활동 시기/일시 1897년~1938년 - 김성학 서울, 경상북도, 황해도, 평양 등의 성당과 충청남도 아산 공세리성당에서 사목과 교육사업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38년연표보기 - 김성학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8년 - 김성학 공세리성당 교회 묘지 안장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3년 - 김성학 대전가톨릭신학교 성직자 묘지로 이장
출생지 평안남도 은산
학교|수학지 페낭신학교 - 말레이시아 페낭
학교|수학지 예수성심신학교 - 서울 용산
활동지 서울, 경상북도, 황해도, 평양 등의 성당과 충청남도 아산시 공세리성당지도보기
활동지 사제 서품 - 서울 약현성당
성격 천주교 신부
성별
대표 경력 공세리성당 주임신부

[정의]

일제강점기에 충청남도 아산시 공세리성당 주임신부로 재직한 천주교 사제.

[개설]

김성학(金聖學)[1870~1938]은 평안남도 은산에서 태어났으며 세례명은 알렉시오이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던 부모는 당시 계속되던 병인박해[대원군에 의해 1866년부터 1871년까지 지속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 사건]를 피해서 강원도 이천군을 거쳐 서울로 이주하였다. 1883년 당시 조선교구 교구장이던 블랑 주교에 의하여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동료 신학생 4명과 함께 말레이시아 페낭신학교로 유학하여 8년간 공부하다가, 용산에 설립된 예수성심신학교[가톨릭대학교의 전신]로 1892년에 전학하여 계속 신학을 공부하였다.

1897년 사제 서품(敍品)을 받고,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에서 빌렘 신부의 보좌(補佐)로 6개월간 활동한 후, 1898년 6월부터 경상북도 가실성당의 주임신부로 활동했다. 1901년에 김천성당으로 옮겨 사목(司牧)하면서 성의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후 10년간 황해도 장연성당 주임신부로 활동했으며, 1916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의 교수신부로 임명되어 사제 양성에 힘썼다. 1922년에 평양교구로 파견되어 여러 성당의 주임신부를 맡았고, 기예기술여학교를 설립했다. 1936년에는 충청남도 아산 공세리성당으로 전근하여 사목에 종사하였다. 1938년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김성학 신부는 1897년 12월에 한국인으로서는 여덟 번째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에서 안태훈[안중근 의사의 부친]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성당을 세우고 사목하던 프랑스 선교사 빌렘(N. J. Willhelm)[1860~1936] 신부를 6개월간 보좌한 후, 1898년 6월부터 경상북도 가실성당[현 경상북도 왜관읍 낙산리]의 2대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아 활동하였다. 1901년에 김천성당 초대 주임으로 옮겨서 성의학교(聖義學校)[현 성의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07년에는 김천성당을 세웠다.

1911부터는 황해도 장연성당 주임으로 옮겨서 10년간 사목하였고, 1916년에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의 교수신부로 임명되어 라틴어를 강의했다.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에 가담한 일부 신학생들이 퇴학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22년 평안도로 파견되어 1년간 임시로 전교하다가, 선교 관할권이 파리외방전교회에서 미국의 메리놀외방전교회로 이양된 1923년 평양 관후리성당 3대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1927년 평양교구가 설립되면서 평양 관내의 영유성당 6대 주임으로 발령을 받아 사목하면서 기예기술여학교를 설립하였다. 1931년 신설된 평양 관내의 서포성당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사목하였고, 메리놀외방전교회의 고문(顧問)으로 메리놀회가 평양교구에서 자리를 잡고 안정적 활동을 펼치는 데 기여하였다.

14년간 평안도에서 활동한 김성학 신부는 1936년 충청남도 공세리성당 주임신부로 전근하여 사목을 했다. 하지만 1938년 8월 28일 관할 소동리공소 강당 축복식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다리가 부어올라 병석에 누웠다가 9월 8일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사상과 저술]

김성학 신부는 1933년 평양 서포성당에서 호교론서(護敎論書)인 『진교변호(眞敎辯護)』를 저술하였다.

[묘소]

김성학 신부는 1938년 공세리성당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가 2003년 대전가톨릭신학교 성직자 묘지로 이장(移葬)되었다.

[상훈과 추모]

1938년 김성학 신부의 장례식에는 서울교구의 많은 성직자와 평양교구의 성직자와 신자 대표가 참석해 고인의 공적과 성덕을 기렸다. 2008년 대전교구사연구소가 대전교구 성직자 묘지 안내서인 『달릴 길을 다 달리고』를 발간했는데, 김성학 신부 편에 삶과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2009년 9월 20일 자 『가톨릭평화신문』 기획기사 ‘한국교회 사제열전’에 김성학 신부 기사가 실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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