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7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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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昌愚 |
영어공식명칭 | Han Changw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형열 |
출생 시기/일시 | 1910년 - 한창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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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49년 - 한창우 경향신문사장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978년 12월 9일 - 한창우 사망 |
출생지 | 충청남도 아산시 아산호로20번길 33[인주면 공세리 64] |
묘소 | 경기도 평택시 도곡동 |
성격 | 언론인 |
성별 | 남 |
본관 | 청주(淸州) |
대표 경력 | 경향신문사장 |
[정의]
광복 이후 시기에 주로 활동한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언론인이자 정치인.
[개설]
한창우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공세리성당을 다니는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자랐다. 부친 한규동(韓奎東)은 1923년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 아산지방부(牙山地方部)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한창우(韓昌愚)[1910~1978]는 1910년 충청남도 아산시 아산호로20번길 33[인주면 공세리 64]에서 태어났다. 1921년 영인면 아산리 아산공립보통학교[영인초등학교 전신], 1925년 휘문고등보통학교, 1931년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에는 천주교 계열 학교인 동성상업학교[동성고등학교 전신] 교사로 부임하였다. 1934년에 결혼하여 1935년에 얻은 장녀는 1960년에 장면(張勉)[1899~1966]의 차남과 결혼해 사돈 관계를 맺었다.
1947년 천주교가 주관하던 경향신문사 비서장 겸 경리부장으로 취임하였고,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1949년 경향신문사장이 되었다. 노기남(盧基南)[1902~1984] 신부 등과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는 등 천주교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활동하였다. 1950년대에는 민주당 창당과 장면 부통령 선출을 위해 힘썼다.
1959년 자유당 정권을 비판한 ‘여적(餘滴) 필화사건’으로 탄압을 받았고, 『경향신문』 폐간 조치로 이어졌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복간에 앞장섰지만, 이듬해 5·16군사쿠데타로 결국 신문사장직을 잃게 되었다. 유원흥업(裕原興業)을 경영하는 등 경제인으로서 활동하였으나,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1978년 12월 9일 사망하였다.
[묘소]
한창우의 묘소는 경기도 평택시 도곡동 선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