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750
한자 成達永
영어공식명칭 Seong Dalyeong
이칭/별칭 경백(景伯),비파헌(琵琶軒)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석당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을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3년 6월 16일연표보기 - 성달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7년 - 성달영 대한광복회 가입 및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33년 1월 30일연표보기 - 성달영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9년 10월연표보기 - 성달영 외 6명을 기리는 독립투쟁의사 광복회원기념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성달영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성달영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석당리 지도보기
묘소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석당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본관 창녕
대표 경력 대한광복회원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아산 출신으로 국내 항일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

[개설]

1917년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충청도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 등을 하면서 항일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이다.

[가계]

성달영(成達永)[1873~1933]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경백(景伯), 호는 비파헌(琵琶軒)이다. 아버지는 창녕성씨(昌寧成氏) 유수공파의 22세손 성지호(成志鎬)이며, 충숙공파의 22세손 성익호(成翊鎬)의 양자로 들어갔다. 동생은 성문영(成文永)으로 대한광복회 활동 당시 경찰에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성달영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종식(閔宗植) 의진(義陣)에 종군하여 홍주성(洪州城) 전투에 참가하였다.1917년에는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군자금 수합 및 친일 부호 처단에 참여하였다.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1915년에 통합하여 결성된 혁명 단체로서,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중국 만주(滿洲)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 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다. 또한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하여 혁명 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 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 건설,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 처단과 친일 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성달영은 군자금 모집 활동을 수행하였으며, 1918년 1월 장두환(張斗煥)·김경태(金敬泰)·임봉주(林鳳柱) 등이 아산군 도고면장으로 친일 행위를 자행하던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할 때 자신의 집을 논의 장소로 제공하며 거사를 지원하였다.

성달영은 1918년 초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되어 보안법 위반 등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공주감옥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재판 결과 무죄로 석방되었으며, 1933년 1월 30일 사망하였다.

[묘소]

성달영의 묘소는 아산시 도고면 석당리에 있다고 하나 현재는 확인이 어렵다.

[상훈과 추모]

1969년 10월 성달영, 장두환(張斗煥), 유창순(庾昌淳), 유중협(柳重協), 강석주(姜奭周), 조종철(趙鍾哲), 김정호(金鼎鎬) 등 대한광복회원 7명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인 ‘독립투쟁의사 광복회원기념비(獨立鬪爭義士光復會員記念碑)’가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삼룡동 295에 건립되었다.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대한 성달영의 공훈을 기려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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