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749 |
---|---|
한자 | 李學承 |
영어공식명칭 | Lee Hakseung |
이칭/별칭 | 경습(景習)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필준 |
출생 시기/일시 | 1852년 - 이학승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874년 - 이학승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74년 - 이학승 무신겸선전관 재임 |
활동 시기/일시 | 1883년 - 이학승 훈련원주부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 4월 - 이학승 장위영대관으로 소속 부대를 이끌고 출동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 4월 - 이학승 부대 인천항을 거쳐 군산포 도착, 전주성 입성, 전주성을 나와 남하, 전라도 장성에서 동학농민군과 전투 |
몰년 시기/일시 | 1894년 4월 - 이학승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94년 7월 18일 - 이학승 좌승지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897년 - 이학승 순의비 건립 |
출생지 | 충청남도 아산시 |
묘소 |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신현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전주 |
대표 경력 | 장위영대관|우포청종사관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무신으로 동학농민혁명 때 토벌을 위한 관군으로 출동하여 전라도 장성 황룡촌전투에서 전사한 인물.
[개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도 장성 월평전역(月坪戰役)[황룡촌(黃龍村) 전투]에서 동학농민군과 싸우다 패하고 전사하였다.
[가계]
이학승(李學承)[1852~1894]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습(景習)이다.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한 쌍호당(雙壺堂) 이단석(李端錫)의 6세손이자 충청수사(忠淸水使)와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냈던 이응혁(李應爀)의 증손자이다. 아버지 또한 무과를 보고 군수를 지낸 이종규(李鍾奎)이다.
[활동 사항]
이학승은 1852년(철종 3)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났다. 1874년(고종 11) 무과에 급제하여, 1881년(고종 18)부터 관직에 나아갔다. 1881년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으로 있다가 1883년(고종 20)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가 되었다. 이후 중추부도사(中樞府都事), 장위영초관(壯衛營哨官), 우포청종사관(右捕廳從事官) 등을 지냈다. 1894년(고종 31) 전라도에서 동학군이 무장봉기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의 지휘 아래 장위영대관(衛領官隊官)으로 소속 부대를 이끌고 출동하였다.
이학승의 부대는 1894년 4월 3일 인천항에 도착하여 4일 인천항을 출발, 5일 군산포에 도착하여 6일 상륙하였다. 이후 관군이 전주성에 들어가자 동학농민군은 전투를 피하였다. 4월 18일 관군은 전주성을 나와 남하를 시작하였고, 별동대와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장성에서 마주쳤다. 당시 이학승은 선봉장으로 300명을 이끌고 월평전역에서 싸우다 패하고 전사하였다. 관군은 동학농민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묘소]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신현리에 묘가 있다.
[상훈과 추모]
1894년 7월 18일 의정부(議政府)의 건의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고 이후 장충단(奬忠壇)에 배향되었다. 1897년(고종 34)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 비문을 지은 ‘증 좌승지 이공학승 순의비(贈左承旨李公學承殉義碑)’가 세워졌다. 이 비석은 현재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신호리의 사적 제406호 장성 황룡 전적(長城黃龍戰蹟)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