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733
한자 徐丙林
영어공식명칭 Seo Byungrim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최만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07년 7월 - 헤이그 밀사 사건, 고종 퇴위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07년 8월 -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활동 시기/일시 1907년 10월 - 서병림 상판운에서 이강년 의진에 합류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08년 6월 - 이강년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일본군에게 잡힘
추모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 서병림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거주|이주지 거주지 - 충청남도 아산시
성격 의병
성별
본관 이천
대표 경력 의병장

[정의]

개항기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개설]

서병림(徐丙林)은 충청남도 온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동하였고, 1907년(고종 44) 10월 운강(雲岡) 이강년(李康秊) 의진(義陣)에 합류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가계]

서병림의 본관은 이천(利川)이고, 의병 운동 당시 거주지는 온양이었다.

[활동 사항]

1907년 7월 헤이그(Hague)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하고 8월에는 일제에 의해 군대까지 강제 해산되자, 서병림은 국권 회복을 위해 온양에서 의병장으로 떨쳐 일어섰다. 1907년 10월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이강년 의진에 합류하였다.

이강년 의진은 1895년(고종 32) 을미의병에 이어 1907년 의병을 일으켜 김상태(金尙台), 백남규(白南奎) 등 유능한 해산 군인과 합류하여 대부대로 성장하였으며 원주, 단양, 제천, 안동에 이르기까지 태백산맥을 오르내리며 주변 지역에서 항쟁을 벌였다. 이강년 의병장은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결성하였을 당시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에 선임되었다.

서병림은 1907년 10월 상판운(上板雲)[현재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판운리]에서 이강년 부대에 합류하였으며, 제천 일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을 벌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즈음에 이강년 의병장이 정해창(鄭海昌)에게 중군장(中軍將), 하한서(河韓瑞)에게 도선봉장(都先鋒將), 박갑주(朴甲胄)에게 좌선봉장(左先鋒將)을 각각 맡기면서 서병림(徐丙林), 노면지(盧勉祗)와 더불어 사태를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볼 때, 서병림은 이강년 의진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강년 의병장은 1908년(순종 2) 6월 4일 청풍 까치성[작성산(鵲城山)]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일본군에게 잡힌 후 10월 13일 교수형으로 51세로 일생을 마쳤으며, 서병림의 행적도 알려지지 않는다.

[상훈과 추모]

1995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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