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730
한자 李晟
영어공식명칭 Lee Seong
이칭/별칭 오경사(五經笥)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병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251년연표보기 - 이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309년 - 이성 국자박사, 합문지후, 좌사보에 임명되었으나 사임 후 낙향
활동 시기/일시 1314년 - 이성 민부전서로 올려 치사하게 함
몰년 시기/일시 1325년연표보기 - 이성 사망
성격 문관
성별
본관 담양
대표 관직|경력 온수감무|민부전서|화평부사

[정의]

고려 후기 충청남도 아산의 지방관이자 문신.

[개설]

이성(李晟)[1251~1325]은 검소하고 허식이 없었으며, 젊어서부터 학업에 열중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지 학자가 구름같이 모여들었다고 하며, 사람들은 이성을 ‘오경사(五經笥)’[오경에 능통한 사람]라고 불렀다.

[가계]

이성의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활동 사항]

이성은 20세 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온수감무(溫水監務)를 거쳐 수원사록(水原司錄)에 올랐다. 임기를 마친 후 가족을 데리고 죽계(竹溪)의 시골집으로 돌아가 벼슬을 바라지 않고 고서를 연구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1309년(충선왕 1) 59세 때 천거를 받아 국자박사(國子博士)에 임명되었고 합문지후(閤門祗候)를 거쳐 좌사보(左思補)가 되었지만, 다시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갈 때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이 이성의 초당에 모여 주연을 베풀고 전별하였다.

충선왕이 원나라 연경(燕京)의 저택에서 이성의 명성을 듣고 벼슬을 건너뛰어 내서사인(內書舍人)으로 특별히 임명하였으며, 전의부령(典儀副令)·예문응교(藝文應敎)로 승진시켰다가 선부의랑(選部議郎)에까지 올랐다. 1314년(충숙왕 1)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려고 하자 민부전서(民部典書)로 올려 벼슬을 마치게 해주었다. 후에 화평부사(化平府使)가 되었다가 또다시 사직하였다. 75세에 사망하였는데 슬하에 아들이 없었다.

[학문과 저술]

이성의 한시 「귀전영(歸田詠)」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약초 섬돌 맑은 바람 내 늙음을 가려주고[약체청풍기아로(藥砌淸風欺我老)]

대숲 시내 밝은 달빛 내 마음을 꼬득이리[죽계명월유오정(竹溪明月誘吾情)]

간밤에 귀전(歸田)의 뜻 이미 결심했으니[작소이결귀전계(昨宵已決歸田計)]

눈 녹은 강남길을 필마 타고 가리라[설진강남필마행(雪盡江南匹馬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