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704
한자 洪萬朝
영어공식명칭 Hong Manjo
이칭/별칭 종지(宗之),만퇴(晩退)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여송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45년연표보기 - 홍만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69년 - 홍만조 식년시 생원 입격, 성균관 유생이 됨
활동 시기/일시 1678년 - 홍만조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88년 - 홍만조 부수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89년 - 홍만조 부응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90년연표보기 - 홍만조 충청도관찰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91년 - 홍만조 승지, 전라도관찰사, 도승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93년 - 홍만조 강화유수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96년 - 홍만조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718년 - 홍만조 우참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719년 - 홍만조 기로소에 들어감
활동 시기/일시 1721년 - 홍만조 판의금부사, 좌참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722년 - 홍만조 판돈녕부사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725년연표보기 - 홍만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27년연표보기 - 홍만조 묘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742년연표보기 - 홍만조 양조은포비 건립
거주|이주지 거주지 - 서울특별시
묘소|단소 홍만조 묘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 산22-1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자은영당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 지도보기 안골
성격 문관
성별
본관 풍산
대표 관직|경력 충청도관찰사|판돈녕부사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아산에서 활동하였던 문신.

[개설]

홍만조(洪萬朝)[1645~1725]는 충청도관찰사를 비롯하여 여러 관직을 지낸 문신으로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에 있는 자은영당(自隱影堂)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홍만조가 1719년(숙종 45)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던 당시의 모습을 그린 『기사계첩(耆社契帖)』은 국보 제325호로 지정되어 있다.

[가계]

홍만조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종지(宗之), 호는 만퇴(晩退)이다. 사헌부대사헌을 지낸 홍이상(洪履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천안군수를 지낸 홍탁(洪𩆸)이고, 아버지는 홍주천(洪柱天)이다. 어머니는 증(贈) 영의정 김광찬(金光燦)의 딸이다. 부인은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권진(權瑱)의 딸이다. 아들로 홍중휴(洪重休), 홍중인(洪重寅), 홍중징(洪重徵)이 있다.

[활동 사항]

1669년(현종 10) 성균관 유생(儒生)이 되고, 1678년(숙종 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검열(檢閱)을 거쳐 지평(持平)·정언(正言)을 지냈다. 그 뒤 1688년(숙종 14) 부수찬(副修撰), 이듬해 부응교(副應敎)를 거쳐 1690년(숙종 16)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음 해에 돌아와 승지, 전라도관찰사, 도승지가 되었다. 1693년(숙종 19) 강화유수가 되었고, 1696년(숙종 22)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전라도·강원도·함경도·경상도·경기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대사간, 형조참판, 한성부판윤, 좌참찬, 형조판서를 거쳐 1718년(숙종 44) 우참찬을 지낸 뒤 1719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1721년(경종 1)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좌참찬을 역임하고, 이듬해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학문과 저술]

시문집으로 『만퇴당집(晩退堂集)』이 있다.

[묘소]

홍만조의 묘소는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 풍산홍씨(豊山洪氏) 묘역에 있다. 홍만조 묘비는 1727년(영조 3)에 세워졌으며, 묘 전면 양쪽에 묘비와 1742년(영조 18)에 건립된 양조은포비(兩朝恩褒碑)가 각각 세워져 있다. 묘비는 이수(螭首)[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를 올린 형태로, 전면에는 ‘조선 숭록대부 판돈녕부사 겸 판의금부사 세제좌빈객 홍공만조지묘 증 정경부인 안동권씨 부우(朝鮮崇綠大夫判敦寧府事兼判義禁府事世弟左賓客洪公萬朝之墓贈貞敬夫人安東權氏附右)’라 쓰여 있다.

묘소 앞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는 장방형 대좌(臺座)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옥개형(屋蓋形) 이수를 올린 형태이다. 정·측면 1칸 규모의 비각 내부에 보존되어 있다. 비문은 권이진(權以鎭)이 찬(撰)하고, 홍양한(洪良漢)이 서(書)하였으며, 전서(篆書)를 홍명한(洪名漢)이 썼다. ‘숭록대부 판돈녕부사 증 영의정 시 정익 만퇴홍공 신도비명(崇綠大夫判敦寧府事贈領議政諡貞翼晩退洪公神道碑銘)’이라 쓰여 있다.

[상훈과 추모]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에 있는 자은영당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시호는 정익(貞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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