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696
한자 鄭斗卿
영어공식명칭 Jeong Dugyeong
이칭/별칭 군평(君平),동명(東溟)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성봉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97년연표보기 - 정두경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26년 - 정두경 김류 등과 함께 중국 사신 접대
활동 시기/일시 1629년 - 정두경 별시문과에 장원급제
활동 시기/일시 1632년 - 정두경 낭청, 정언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43년 - 정두경 수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49년 - 정두경 부수찬, 부교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66년 - 정두경 예조참의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69년 - 정두경 예조참판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673년연표보기 - 정두경 사망
출생지 서울특별시
묘소|단소 정두경 묘 - 경기도 양주시 산북동
성격 문관|학자
성별
본관 온양
대표 관직|경력 예조참판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아산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문신이자 학자.

[개설]

정두경(鄭斗卿)[1597~1673]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으로 가학(家學)이었던 도가사상(道家思想)에 바탕을 둔 경세가이며 뛰어난 시인이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차천로(車天輅), 민사성(閔師聖), 공희성(孔希聖), 이진행(李震行), 정운붕(鄭雲鵬), 강취무(姜就武) 등과 함께 아산팔문장(牙山八文章)이라 불렸다.

[가계]

정두경의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군평(君平), 호는 동명(東溟)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경기도사(京畿都事)를 지낸 정담(鄭䃫)이며, 할아버지는 총계당(叢桂堂) 정지승(鄭之升), 아버지는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낸 무송당(撫松堂) 정회(鄭晦)이다. 어머니는 광주정씨(光州鄭氏)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낸 정이주(鄭以周)의 딸이다. 부인은 진주강씨(晉州姜氏)로 관찰사를 지낸 강홍중(姜弘重)의 딸이다.

[활동 사항]

정두경은 14세 때 별시(別試) 초선(初選)에 입격(入格)하여 문명을 떨쳤다. 1626년(인조 4) 벼슬이 없는 선비였으나 문학이 뛰어나 김류(金瑬) 등과 함께 중국 사신을 접대하였다. 1629년(인조 7)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환(仕宦)[벼슬살이]을 시작하였다. 1632년(인조 10) 2월에 낭청(郎廳), 4월에 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비록 세상일에는 어두웠으나 문장이 출중하고 뜻이 저속하지 않았다는 평을 들었다. 1643년(인조 21) 3월 수찬(修撰), 1649년(인조 27) 4월에 부수찬(副修撰), 9월에 부교리(副校理), 1666년(현종 7) 7월 예조참의(禮曹參議) 등을 지냈다.

효종이 즉위하자 임금이 하여야 할 절실한 도리를 27편의 풍시(諷詩)로 지어 올려 효종으로부터 호피(虎皮)를 하사받았다. 1669년(현종 10) 5월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임명되었을 때 "정두경이 문장을 잘하여 시문에 득의하여 격조가 빼어난 곳은 고인의 작품을 따를 만해서, 논자들이 동방에 이런 작품이 없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정두경의 졸기(卒記)에 의하면 "성품이 호탕하고 술을 즐겼다. 그래서 자신을 검속하지 못했고 농담을 잘하였다. 문장은 사마천(司馬遷)을 법으로 삼았고, 시는 두공부(杜工部)[두보(杜甫)]에 가까웠다. 그 문장과 시는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것이 많았다. 조정에 벼슬한 지 40여 년이었지만 끝내 문형(文衡)[대제학(大提學)]을 맡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라는 평을 들었다.

[학문과 저술]

『동명집(東溟集)』 26권이 있다.

[묘소]

정두경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산북동에 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