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멸왜기도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424
한자 天道敎滅倭祈禱運動
이칭/별칭 무인독립운동,무인멸왜독립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형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3년연표보기 - 천도교멸왜기도운동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38년연표보기 - 천도교멸왜기도운동 종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박인호|정규희|이규호|천도교 아산교구

[정의]

1930년대 천도교 구파 중심으로 충청남도 아산 지역 교인들이 민족 독립을 기원하며 전개한 기도문 암송 운동.

[개설]

천도교멸왜기도운동(天道敎滅倭祈禱運動)천도교에서 1936년부터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기도문을 매일 아침, 저녁 식고(食告)[천도교에서 식사 때마다 한울님에게 고함] 때 외도록 하고 유사시에 대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던 운동이다. 아산 지역에서도 천도교 아산교구를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며 1938년 2월 이후 정규희(丁奎熙), 이규호(李圭鎬) 등 중심 인물들이 검거 및 구금되면서 활동이 위축되었다.

[역사적 배경]

천도교 구파(舊派)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인 1933년 무렵부터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담아 중앙 인사들을 중심으로 멸왜기도 암송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1936년 이후 천도교 지도자 박인호(朴寅浩)의 적극 추진에 힘입어 더욱 확대되었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전 교단 차원으로 운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특별희사금 모금과 기도 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천도교멸왜기도운동은 황해·충청·경기·전라 등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고,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도 천도교 구파 교인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경과]

아산 지역의 천도교멸왜기도운동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아직까지 자료상 확인할 수 없다. 박인호가 예산 출신으로 아산 역시 천도교 구파가 중심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비교적 빠른 시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천도교 아산교구정규희가 교구장을 맡고 있었다. 정규희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였던 정태영(丁泰榮)의 아들이자 선장면 3·1운동의 주동자이기도 하였다.

천도교멸왜기도운동은 최제우(崔濟愚)의 「안심가(安心歌)」를 변형해 식사 전에 외우는 식고문의 형태로 전국적으로 전파되었는데 "개 같은 왜적놈을 한울님께 조화받아 일야간에 소멸하여"라는 구절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1937년 이후로는 일제의 탄압을 방지하기 위해 "동양평화의 기초가 하루라도 속히 확립되기를 기원합니다."라는 문구로 고쳤다.

[결과]

천도교멸왜기도운동은 1938년 2월 17일 황해도에서 발각되었다.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도 교구장 정규희가 일제 경찰에 검거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온양의 이규호도 13일 동안 온양경찰서에 구금되는 등 중심인물들은 고초를 겪었다. 이처럼 천도교멸왜기도운동으로 인해 일제의 탄압이 심화되어 천도교 구파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아산 지역에서도 더 이상 교구 활동이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의의와 평가]

천도교멸왜기도운동은 동학·천도교 운동사에서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혁명, 1904년 갑진혁신운동[갑진개화운동], 1919년 3·1운동과 함께 4대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인들의 의식을 깨우치기 위해 식사 시간에 맞춰 식고문을 암송하는 계획과 독립운동 기금 모집 및 기도 운동의 확대를 꾀했던 것은 일제 말기 독립운동이 위축된 상황에서 새로운 모색이었고 아산 지역 독립운동이 줄기차게 이어졌음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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