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수대첩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367
한자 溫水大捷
영어공식명칭 Great Victory at Onsu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명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236년 8월 - 온수군에 몽골군 출몰
전개 시기/일시 1236년 9월 - 현려 등이 중심이 되어 몽골군 격퇴
발생|시작 시기/일시 1256년 6월연표보기 - 몽골군 온수현 공격
종결 시기/일시 1256년 6월 - 이천의 주도 아래 몽골군 격퇴
성격 대몽 항쟁
관련 인물/단체 이천

[정의]

1256년(고려 고종 43)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서 몽골군과 싸워서 크게 이긴 승리.

[개설]

1231년(고종 18)부터 몽골이 고려에 침입하기 시작하여 수십 년간 전쟁이 지속되었는데 아산 일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1256년 6월에 온수현(溫水縣)[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장군 이천(李阡)이 지휘한 고려군이 몽골군을 크게 격퇴시킨 대첩이 온수대첩이다.

[역사적 배경]

13세기 칭기즈칸(Chingiz Khan)의 통솔 아래 북방 초원 지대를 석권한 몽골은 1231년부터 고려를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침략의 이유는 몽골의 대제국 건설의 일환이었다. 고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적극 항쟁으로 맞섰다. 다음 해인 1232년(고종 19)에 고려 정부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며 장기전 태세에 돌입하였다. 고려는 백성들을 산성(山城)과 해도(海島)에 입보(入保)[들어가서 지킴]시키며 몽골군에 대한 항쟁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아산 지역도 예외는 없었다.

1236년(고종 23) 8월부터 온수군(溫水郡)에 몽골군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온수군은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 관내를 흐르는 곡교천의 남쪽 지대에 있었던 군현이었다. 그리고 곡교천을 통해 아산만과 연결되어 있었다. 마침내 1236년 9월에 몽골군이 온수군을 포위하였다. 한편, 온수군이 있었던 아산 일대는 당시에 해로(海路)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몽골군이 온수군을 포위하자 군리(郡吏)[향리(鄕吏)] 현려(玄呂) 등이 성문을 열고 나가 몽골군과 싸워 2명의 목을 베었다. 또한 몽골군을 향해 화살을 쏘고 돌을 던져 맞서 싸워 몽골군 200여 명을 죽였다. 또한 이때 백성들이 노획한 몽골군의 병장기도 매우 많았다.

시간이 흘러 20년이 지난 1256년(고종 43)에 몽골군이 온수현을 또 침략해 왔다. 이즈음에 온수군은 온수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몽골군이 온수현과 아산만 일대를 공격한 이유가 있었다. 이 일대는 몽골군이 남쪽으로 공격하여 내려갈 때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또한 아산만을 이용하여 뱃길로 당시 수도인 강화도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인근의 발달된 평야지대에서 식량이 집산된 곳이기도 하였다. 고려 13조창(漕倉) 중에서 아산만에 인접한 아주 하양창(牙州河陽倉)은 몽골군의 좋은 표적이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로 몽골군은 온수현을 공격했던 것이다.

[경과]

1256년 초 충청도 순문사 한취(韓就)는 아주(牙州)에서, 정인경(鄭仁卿)은 신창(新昌)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어 6월에는 강화에서 200명의 수군을 이끌고 파견된 이천이 온수현에서 몽골군과 싸워 적 수십 명의 목을 베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100여 명을 되찾았다.

[결과]

1256년 온수현에서 벌어진 몽골군과의 전투는 고려군의 큰 승리로 끝났다. 당시 실권자인 최항(崔沆)이 은 6근을 이천의 군사들에게 상으로 주었다.

[의의와 평가]

이천이 온수현과 아산만 일대 방어에 성공한 의미 있는 전투가 온수대첩이다. 한편, 대한민국 최초의 국산 잠수함인 ‘이천함’은 바로 이천의 이름을 기린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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